2015년 3월 30일 월요일

92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한국 근대고전 문학작품들을 살펴보다가 육당 최남선의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최남선은 한국 근대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1904년 그의 나이 불과 열다섯 살 때 동경으로 유학을 간다. 황실에서 파견하는 특파 유학생으로 선발된 최남선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어린 나이에 외국으로 조기 유학을 떠난 셈이다. 이광수, 홍명희, 최남선 등 일명 ‘동경삼재(東京三才, 동경의 3대 천재)’가 교류를 시작한 것이 최남선의 나이 열일곱 살 때이니, 이들은 청소년기에 이국 타향에서 허물없이 생각을 주고 받았던 조선의 인물들이었다.   

한국 근대문학에서 새로운 형식의 시(신체시)로 인정받은 ()에게서 소년에게는 최남선이 1907년 귀국한 뒤 민족의 시대적 각성을 위한 신문화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이광수와 함께 창간한 소년지의 창간시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철썩, 철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같은 바윗돌이나 /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 철썩, 철썩 척 튜르릉 꽝

나중에 그의 시집 백팔번뇌의 서시로 실린 이 시는 도래하는 문명의 힘과 미래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각오가 잘 드러나 있다. 파도와 함께 밀려오는 바다의 위력앞에서 큰 산이나 거대한 바웟돌 같은 무엇도 힘없이 쓰려 버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돌이킬 수도 저항 할 수도 없는 시대의 조류이기에 끝내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최남선에게 있어 조선 개화의 필요성과 당위성은 마치 거대한 파도와 같이 저항할 수없는 것이었다.  

신문관 창립이후 3.1운동까지 10여년간 최남선은 자타가 공인하는 신문화 운동의 기수였다. 하지만 기미 독립선언서의 작성자로 3년여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이후 그는 민족주의적 지조와 학자의 길 사이에서 학자쪽을 선택하게된다. 후에 그는 당시 그의 결정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있다.

지조냐 학자냐 양자중 골라잡아야하게 된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븥잡으라고 하였으나 나는 그 뜻을 버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다 버렸다. 그것은 대중의 나에 대한 분노가 여기서 시작돼 나오는 것을 내가 잘 알며 그것은 나를 사랑하는 이기적인 마음에 온 것임을 알고 있다.”

학자의 길을 선택하면서 그는 후에 친일파 변절자로 낙인이 찍히는 여러가지 오류들을 범하게된다. 특별히 춘원 이광수와 함께 창씨개명에 앞장서고 학도의용군에 조선청년들이 많이 지원할 것을 선동하는 강연회를 주최하고 또한 관련 글을 써서 일제정권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광복후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비난을 받다가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형무소에 수감, 투옥까지 되었으나 후에 병보석을 출감했다.

조선의 독립이 한 세대가 지나도록 요연한 현실처럼 느껴지던 세대를 살아간 일제통치말기에 조선 지식인들은 어쩔수 없이 변절의 길을 걸었다.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끝까지 투쟁한 독립 투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문학가, 지식인들은 타협을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과연 비난의 돌을 던질 수 있을까… 

2015년 을미년 새해를 시작하며 바닷가 나가 파도소리에 한참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 “철썩, 철썩 척 쏴아…”세월은 가고 습관처럼 새해가 찾아오곤 하지만 100여년전 최남선에게 조선의 개혁을 요구하는 강렬한 시대적 요청으로 들려왔던 그 파도 소리는 그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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