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
“우신예찬”(The Praise of
Folly)
풍자와
해학은 억압받는 계층이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스트레스 해소용 가면이다.
거룩한 척하면서 위선적인 인생을 살고 있던 중세 암흑기 시대의 성직자들, 똑똑한
척 하지만 정작 삶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철학자, 이상주의자들을 향해 풍자적으로 꾸짖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 우신예찬(愚神禮讚)이다.
태어나면서
모두는 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나는데 어리석은 여신 모리아는 울음 대신 웃음을 터뜨리며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 모리아의 입을 빌어 에라스무스는 세상에 정말 어리석음이 무엇이라는 사실을 해학적으로
풀어나간다.
해산의
고통을 경험한 후 또 다시 아이를 갖는 어리석음, 면죄부를 사기 위해 또 다른 죄를 게속 반복하는 어리석음,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을 철학적
사고라고 떠들어대는 어리석음, 위선과 가식, 거짓말로 가득차있는 성직자들을
두려움 때문에 존경하는 어리석음… 에라스무스가 말하는 어리석음은 어쩌면 인간의 한계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세를 지배하던 신학은 인간 중심의 인문학에 밀려난다. 그와 함께 새로운
문예부흥, 즉 르레상스의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당시 그 새로운 지적
탐구의 핵심 개념은 인간의 이성이었다. 하지만 이성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려는 인간의 과욕은 점차 배타적이며
독단적인 태도로 변질된다. 그런 흐름에 반하는 반성적인 움직임이 생겨나는데, 그 대표적인 주자가 에라스무스였다. 그는 이성의 이름으로 휘두르는 지적 오만과 광기,
독단을 버리고 자연의 질서와 본성에 충실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종교개혁의 시발점이었다. 종교개혁은 에라스무스에 의해 알이 만들어졌고,
루터에 의해 부화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기존 카톨릭의 부정, 부패에 대해 반기를 들었지만 루터가
제시한 종교개혁 방법은 오히려 기존세력을 더욱 단합시키고 분쟁을 불러오는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해 중도 노선을 선택했다.
그래서 종교개혁 주의자들에게 에라스무스는 배반자였고, 기존질서를 잡고 있던 카톨릭에게는
이단자였다.하지만 1백년 후 유럽에 엄청난 살상을 불러왔던 종교전쟁을
종식시키고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었을 때 그 조약의 원리는 에라스무스가 주장했던 평화와 종교적 관용의 정신이 있었다.
인간의
역사는 철저한 반복이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라는 전도서의 말씀처럼
우신예찬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진리는 5백년 전 에라스무스가 지적했던 그 중세 사회의 “어리석음”이 오늘날도 그대로 일상의 삶에서 재연,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